15. 처서(處暑) [𝑷𝒍𝒂𝒚𝒍𝒊𝒔𝒕]

上
이수와 나의 만남에서 두 번의 이별 통보가 오갔다. 그날 나는 이수에게 그중 첫 번째 이별 통보를 받았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털며 화장실에서 나오자 이수는 허리를 펴고 침대 끝에 가지런히 앉아있었다. 이수는 고개만 돌려 나를 한참을 바라봤다.

정확한 혹은 맞는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이수는 항상 그 너머의 것을 철저히 바라본다. 이수는 나를 빤히 바라볼 때 내 너머의 그 무언가를 지독히도 지긋이 응시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발가벗은 것처럼 모든 것이 보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를 숨기고 싶어 그 어떤 거짓과 허물을 뒤집어쓰고있어도, 이 똑똑한 애는 내 안에 진짜 무엇이 숨어있는지 볼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이 이수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었고, 이 애를 사랑하게 된 계기다. 이수는 무언가를 판단할 때 그 의도와 의미에 집중한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나 풍문을 타고 들어온 이야기와 같은 것들은 이수에게 큰 의미가 되지 못한다. 이수는 모든 것을 존재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옳고 그름이 아닌 좋고 싫음으로 표현한다. 이수의 눈, 코 그리고 귓속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들은 이수 안에서 뒤섞이며 깨끗하게 이수의 입을 통해 다시 내뱉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축복임과 동시에 이수 본인에게는 저주와 같은 일이라는 것 역시 나는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이수는 매일 밤을 따뜻한 차를 손에 쥐고 무력감과 우울감에 지쳐 잠든다. 이수는 항상 무언가의 본질과 그 의미를 응시하려 하기 때문에 세상 모든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수가 바라보는 것 중 존재 이유가 없는 것, 경이롭지 않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이수의 세상에서 아름답지 않은 것은 딱 하나 존재했다. 그것은 한 번도 바라본 적 없는 이수 바로 자신이었다. 불행하게도 이수는 거울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자신의 눈으로 그녀를 보지 못했다. 이수 자신 그 너머의 무언가를 찾지 못했고 그러기에 이수는 자신이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운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수 자신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 이수는 자신이 곳곳에 꽃이 널린 언덕 위에 진흙이 뭍은 바위 같다고 표현했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수는 점차 자신을 혐오하고 자신을 미워하게 되었다. 무력함은 우울로, 우울은 또다시 불면을 가져왔다. 이수는 나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자신을 미워한다.

나는 이수의 모든 표정을 알고 있다. 이수가 기뻐할 때, 슬플 때, 놀랐을 때 모든 시간에 모든 감정을 같이 공유했기 때문에 그때마다 이수의 얼굴이 어땠는지 정확히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 이수는 또다시 우울과 무력함에 지배되어 있다는 것을 이수의 눈을 보고 느꼈다. 이수와 처음 만나기 시작했을 때 이럴 때마다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삐걱거렸다. 이수를 위로해줘야 할지, 웃게 해줘야 할지 혹은 같이 우울해줘야 할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이수가 자신의 늪에서 항상 잘 벗어났고 내가 어떻게든 그 늪에서 이수를 빼주려 노력할 때마다 내가 감히 알지 못하는 심연으로 더욱더 빠져든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내가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는 죄책감은 종종 나를 괴롭혔지만, 이수는 똑똑한 아이라 믿기 때문에 나는 평소처럼 행동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라 느꼈다. 그 애가 알아서 현명히 극복해 낼 거라 간절히 바라며 필사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나는 뜨거운 열기에 얼굴이 붉어진 것을 확인하고 화장대로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 로션 뚜껑을 돌려 열었다. 날 바라보는 이수의 시선을 무시하고 로션을 손바닥에 조금 덜어 얼굴에 펴 발랐다. 내 손이 아무도 모르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이 얼굴 피부를 통해 느껴졌지만 나는 이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과장해 내 얼굴을 때리며 로션을 발랐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한다 해서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다. 누구보다 이수가 걱정되고, 이수가 잘 견뎌내지 못할까 너무나도 무서웠다.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는다거나 무너져 버리면 어쩔까 두렵다. 그렇지만 나는 이수를 위해 그 모든 것들을 참아내야만 한다.




00:00 뭇별 - 신지훈
03:48 숲 - 최유리
07:36 보고싶었어 - 615
(https://soundcloud.com/615_00/rtwheluldxeq)
11:08 사랑이 아니라 말하지 말아요 - 하만 (Original song by 이소라)
(https://soundcloud.com/haman714/uvhx3czmi1ra?si=18231a0055054427af325585d01a0ee3&utm_source=clipboard&utm_medium=text&utm_campaign=social_sharing)
14:51 비 - 홍이삭
17:39 테두리 - 지천 (Original song by 백아)
(https://soundcloud.com/kimjicheon/baeka)
22:05 마른 날 - 소라
26:30 계절이 돌아오듯 - 진솔
30:33 시 - 김새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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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네일 : 카르멘이라는 이름(Prénom Carmen) (1983)